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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사냥꾼 (96) 제13장 미학적 마케팅

서나노야 2006. 10. 3. 08:05
마음사냥꾼 (96) 제13장 미학적 마케팅 1회 2006.09.29
** 어린왕자는 이렇게 말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아!” 이 말은 사실이다.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을 볼 수 있을까?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을 볼 수 있을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품성’을 볼 수 있을까? 확실히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보이는 것보다 중요하다. 어쩌면 어린왕자의 이 말로 인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작은 불빛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정신세계이며, 그 세계는 안구(眼球)의 가시 범위(可視範圍) 안에서는 볼 수 없다. 또 다른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서 느껴지는 그 무언가를 형상화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변화를 보는 방법이다.

변화의 시작과 완성은 패러다임(Paradigm)에 달려 있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사람은 20세기의 유명한 과학자 토머스 쿤(Thomas Kuhn)이다. 하버드 대학 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혁명적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평가받는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에서, 과학의 발전은 누적된 개선의 결과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파괴와 재창조라는 혁명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 후 이 용어는 과학사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 분야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쓰여 오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기업 경영의 영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매력적이지만 상대적으로 모호하기도 한 이 용어의 일반적 의미는 ‘동시대 집단 속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공통적 가치와 규범의 체계’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보려면 먼저 기존의 패러다임을 버려야 한다. 이 말은 파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선입견에서 벗어나 본질을 보라는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혁신이란 포기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하던 것을 멈추는 것이다. 이 정의를 통해 우리는 피터 드러커의 패러다임을 볼 수 있다. 그는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혁신을 바라보지 않고 혁신의 본질에서 사실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본질을 바라보는 능력을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눈의 능력을 버리고 그토록 얻고자 하는 ‘통찰력’이다. 통찰력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영어는 인사이트(insight)이다. In(내부)+Sight(시야)로 이루어진 합성어다. 내부를 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바라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미학(Aesthetics)은 말 그대로 ‘아름다움’을 공부하는 학문이다. 아름다움은 감정이 반응한 결과이다. 형이상학적인 감동(아름다움)을 머리로 공부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미의 기준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시대마다 지역마다 인종마다 다르다. 어떤 나라는 뚱뚱한 것이 미의 기준이고 어떤 나라는 마른 것이 기준이 된다. 어떤 나라는 여자가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미가 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런 행동은 모험이다. 그래서 미학은 다분히 문화의 소산이고 시대적 거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떠한 문화를 읽는 중요한 코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하고 상대적인 것을 1+1=2라는 과학적 사고나 1+1=2가 될 수도 있다는 철학적 논증으로 풀어 가려 한다면 대단히 곤혹스런 일이 될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다르게도 사용되고 있다. 술의 미학, 죽음의 미학, 엽기의 미학, 고통의 미학, 춤의 미학 등 ‘미학’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또한 특정 대상을 ‘찬양’하거나 ‘추앙’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특정 행위의 ‘중독’과 ‘탐닉’의 철학적 변명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정의한 미의 개념은 우리가 말하는 것[문화코드 또는 무슨무슨 이즘(ism)]과는 다르다. 플라톤이 말하는 미는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것도 대상으로 포함하며, 감각기관을 즐겁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것도 포함한다. 플라톤은 미를 넓은 의미로 이해했다. 미의 범위를 선(善)의 범위와 일치시켜 풀어나갔다. 이런 연결 관계를 통해 진(眞)의 항목 아래에서 선이 다루어지고, 선의 항목 아래에서 미가 다루어진다고 규정했다. 진, 선, 미가 일치된다는 생각은 플라톤의 주장일 뿐만 아니라 고대 희랍의 일반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미 자체가 무엇인지가 플라톤의 관심사였기에 플라톤은 눈으로 느껴지는 미보다는 머리로 이해하는 미의 이념에 도달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영혼이 육체보다 더 완전하며 이데아는 육체나 영혼보다 더 완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플라톤은 미를 육체와 연관시키려 하지 않았다. 미는 영혼이나 이데아의 성격을 가져야 하며 영혼이나 이데아의 미가 육체의 미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고 주장했다. 미는 소멸하지만 미의 이데아는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의 예술론은 그의 철학 및 미론과 결부된다. 그는 예술을 유용한 예술, 생산적인 예술, 모방하는 예술로 구분했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예술을 모방으로 생각했다. 예술이 현실을 모방한다는 생각은 희랍인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플라톤에게 있어서 현실 자체는 이데아의 모방이므로 현실을 모방하는 예술은 결국 더 낮은 모방의 단계로 규정되었다.

플라톤은 주로 미 개념을 중시한 반면 그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미 개념을 제쳐두고 예술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란 인간의 활동이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의하면 단순한 본능에 의존하는 창작은 예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규칙, 수단의 의식적인 응용, 일정한 목적의 지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구두를 만드는 기술이나 선박의 건조도 예술에 속한다. 예술은 예술가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작품이고 이러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그는 일정한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했으며, 이러한 능력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라 불렀다. 창작의 근거를 이루는 지식 또한 예술이라 부른 것이다.

그는 예술에 대해 중요한 개념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바로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 해방)’다. 예술은 감정의 정화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주기도 하며 도덕적인 완성을 도와주기도 한다. 특히 그는 인간의 예술은 행복이라는 최고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패션 산업을 이야기하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가져온 이유는 그들이 발견한 개념을 이해하고 전략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데아’와 ‘카타르시스’는 패션 산업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설픈 정의일지 모르지만 ‘패션은 이데아와 카타르시스의 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비자들은 매장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먼저 그들은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자신의 모습에 교차시킬 것이다. 곧 소비자는 이데아로 들어오게 된다. 판매원의 안내로 걸려 있는 옷을 입고 거울을 보게 된다. 이때 ‘충동구매’라는 감정의 폭발이 그를 이데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것이다. 소비자가 꿈꾸는 이데아는 과연 무엇일까? 소비자는 아름다운 옷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 소비자는 브랜드를 구매하는 것도 아니고, 옷을 구매하는 것도 아니다. 소비자는 자신의 이데아를 보게 된다. 결국 오랜 방황 끝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브랜드를 만나게 된다. 어떤 브랜드는 이런 이데아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마케팅 용어로 ‘브랜드 비전’이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한다면 인간 내면에 있는 ‘완전한 선’을 제시하는 이데아라고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만날 수 있는 진정한 가치인 진, 선, 미는 브랜드 안에도 있다. 진(眞)은 완벽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말하는 것이고, 선(善)은 뿜어져 나오는 브랜드 호감도를 말하는 것이며, 미(美)는 눈으로 느낄 수 있는 브랜드의 이미지다. 이처럼 브랜드 안에서 진, 선, 미의 세 가지 요소가 병합되어 이데아 메시지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미학적 패션 마케팅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데아가 소비자에게 충족되었을 때 예술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소비자는 구매를 통해서 맛보게 된다. 이러할 때 구매는 이데아의 소유이며, 자기창조의 행위이며, 자기완성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