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정리함

[허생아!허생아!(4)]명분과 실리, 무엇을 지킬 것인가

서나노야 2006. 9. 13. 10:35

칼럼니스트로부터...

오전에 강의가 있어서 춘천을 다녀왔답니다. 화목원. 말 그대로 꽃과 식물과 나무가 있는 곳이어서 눈으로 자연을 느끼고.... 오며가며 의암댐에서 경춘가도 드라이브하듯 다녀왔지요. 다시 돌아온 서울은 분주하게 돌아가지만 불끈 주먹 쥐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여러분들의 목요일은 어떠신지요. 자신의 꿈에 마술을 걸어보는, 마술 같은 날이시길 바라며...

- 충정로에서...전미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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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허생 이야기]

명분과 실리, 무엇을 지킬 것인가

 

<허생전〉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이완’의 무능함이다. 그는 나라를 살리기 위한 허생의 뛰어난 계책을 듣고도 그대로 흘려버리는 바람에, 허생도 잃고 나라의 미래도 암울해지고 말았다.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18세기 정조 대의 허례허식과 명분에 집착해 실리를 놓치는 양반들의 모습을 이완을 통해 묘사한 것이다. 시공을 초월한 지금도 이완과 같은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한 기업의 인수합병 협상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D은행의 경영 전략팀은 H은행과 인수합병 협상을 앞두고 밤낮없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봐, 이 대리. 이번 협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과장님.”
“그래. 실수하지 않게 철저히 준비해.”
“예, 과장님.”
각종 자료만 해도 두 트럭 분량, 이 모든 자료를 검토하고 대책을 세워 최선의 협상 전략을 세우기 위해 팀원들은 머리를 쥐어짰다.


H은행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감사까지 겹쳐 다들 기진맥진이었다. 자료와의 전쟁을 치르며 이대리는 계약만 끝나 봐라 하는 심정으로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회의실에는 D은행 팀이 조금 먼저 도착해 앉아 있었다. 곧이어 회의실 문이 열리며 H은행 팀이 너무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들어왔다. D은행 팀은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인지라 여유롭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예상 외로 당당한 H은행 팀을 보자 일순 긴장되었다. 게다가 회의도 H은행 팀이 먼저 안건을 내놓으며 리드하기 시작했다.


‘이거, 회의 시작도 하기 전에 밀리는 거 아냐?’
이 대리는 순간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양 측의 긴장이 극에 달했을 때 이대리가 손을 들며 잠깐 휴식을 제안했다.
“커피 한잔한 후에 계속 진행하면 어떨까요?”
잠시 숨을 돌리는 틈을 타서, 이대리 쪽 D은행 팀원들이 모여서 전략을 짰다.
“우리 은행명과 로고는 절대 양보할 수 없어.”
“예, 알고 있습니다. 절대 양보 못하죠.”
다시 회의가 시작되고 숨 가쁜 협상이 시작되었다. D은행이 반드시 지키려 한 은행명과 로고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지키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결과는 D은행이 이긴 것 같았다.


“잘 싸웠네!”
“고생하셨습니다, 과장님!”
회의를 끝내고 나와 담배를 피우며 이대리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 그런데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하나 따져 보니, 고작 지킨 것이 은행명과 로고뿐이 아닌가. 이때 김 과장도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면 우리는 죽었네.”

 

이런 상황은 개인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기업, CEO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기업, 하루에도 수많은 제품을 광고하며 서울 한복판에 근사한 건물을 가진 폼 나는 기업. 이런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일수록 자신만의 비전을 찾지 못한 채 남들의 시선 때문에 그저 기계적으로 출퇴근하며 시간을 낭비하기 쉽다. 개인에게는 그것이 체면이고 허례허식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허생은 전한다. 조선의 사대부도 그렇게 해서 스스로를 서서히 죽여 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