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HP 두 여걸의 애증 그리고 추락

[조선일보 신정선기자]
마주 보던 두 여자는 잠시 말을 찾지 못했다. 방으로 건너와 달라고 전화를 건 패트리샤 던(HP 전 이사)이 먼저 입을 뗐다. “칼리(피오리나 HP 전 CEO 겸 이사회 의장), 이사회에서 의장을 바꾸기로 결정했어요. 미안해요.” 다른 방에서 3시간 동안 이사회 결정을 기다리던 피오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먼저 입을 연 패트리샤 던이 말을 이었다. “언론에는 자진 사퇴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경력 전환을 위해서 쉬는 거라고 하면 어떨까요? 결정되면 알려주세요.” 몇 시간 후, 해고 통보를 받은 피오리나는 전화로 패트리샤에게 자신의 결정을 알렸다.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나는 해고된 거예요. 그렇게 말하겠어요.”
세계 2위의 컴퓨터 메이커인 미국 휴렛팩커드(HP)사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칼리 피오리나는 지난 8일(이하 현지시각) 방송된 CBS 시사프로그램 ‘60분’에서 지난해 5월 자신이 해고 통보를 받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9일 펴낸 자서전 ‘힘든 선택들’에서도 자신이 부당하게 해고됐다고 주장했다.

해고 사실을 직접 전한 패트리샤 던 당시 HP 이사는 피오리나의 뒤를 이어 HP 이사회 의장에 올랐다. 하지만 1년4개월 후 던 의장은 피오리나처럼 ‘불명예 퇴진’의 길을 걷게 된다.
던을 옭아맨 HP의 ‘정보 유출’ 스캔들은 지난 1월 시작됐다. “아니, 그 사실을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지?” 이사회 보고를 받던 던은 아연실색한다. 일부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서 HP의 미래 전략 계획이 보도됐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사회 회의 중에만 오간 얘긴데…. 도대체 누구지?” 던은 이사들 중에 외부로 정보를 흘린 사람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사설탐정에게 지시, ‘내부의 적’을 색출해 주도록 부탁했다.
넉 달 후, 탐정들은 이사들의 집 전화와 휴대전화 통화 내역을 뒤져 정보 유출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당신이죠?” 던은 조지 키워스 HP 이사에게 증거를 들이대며 자진 사퇴를 요구했다. 키워스는 정보 유출을 시인하며 사임했다.
그러나 일단락되는 듯하던 파문은 전설적인 벤처 투자가 출신인 토마스 퍼킨스 이사가 사표를 던지며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했다. 퍼킨스는 “던 의장이 이사들의 통화 기록을 알아내기 위해 비열한 방식을 동원했다”고 폭로했다. 다른 사람의 명의를 사칭해 통화 기록이나 금융거래 내역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불법 논란이 일자 캘리포니아주(州) 검찰이 진상 파악에 나섰다. 궁지에 몰린 HP는 이사진과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 등 20여명의 통화 기록을 입수한 사실을 시인했다. HP 경영진의 도덕성과 불법 행위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원 에너지·상업위원회와 연방수사국(FBI)까지 수사에 가담했다. 거세지는 사퇴 압력에도 “탐정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몰랐다”며 던은 “내년 1월 사임하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사태는 계속 악화됐다. HP가 고용한 탐정이 기자와 이사들 집의 쓰레기통을 뒤진 사실이 드러났다. HP측에서 “당신의 기사를 애독하는 HP 이사”라며 한 기자에게 컴퓨터 소프트웨어(사용자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스파이 프로그램)가 숨겨진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던은 사임 계획을 앞당겨 지난달 22일 물러났다.
피오리나와 던의 애증의 역사는 길다. 피오리나는 던이 이사회 의장 자리를 얻는 대가로 피오리나 축출에 가담했다고 의심한다. 또 던이 내놓는 의견들이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한다. 이에 맞서 던은 피오리나가 이사회 의견을 묵살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한목소리를 낸다. 피오리나는 “내가 ‘여자’라서 이사회가 나를 부당하게 대했다”고 말했다. 던도 “나를 몰아내려는 세력이 있다”며 “나는 책임이 없으며 ‘방식에 문제가 없다’고 조언한 법률팀의 잘못”이라고 강변했다. 이러한 모습은 “과정이 어쨌건 책임자인 내가 잘못”이라며 고개를 숙인 HP의 현 CEO인 마크 허드와 극명하게 대비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는 11일 “세계 500대 회사의 CEO 중 여성이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소수인 세상”이라며 “옳건 그르건 재능 있는 두 여성의 몰락은 모든 여성에게 투영된다”고 전했다.
(신정선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viole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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