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정리함

개성 vs. 시대적 미의 보편성

서나노야 2006. 10. 12. 07:13

미인과 보편적 기준


 미국의 남성지 ‘에스콰이어’는 2006년도 11월호 표지모델로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여성으로 뽑힌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을 실릴 예정이다. 깡마른 몸매의 여배우들을 선호하는 21세기 헐리우드에서 모래시계 형의 몸매를 지닌 건강미 넘치는 그녀의 육체가 보편적인 미의 기준이 될 수 있을지는 좀 더 세월을 두고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잠깐! 미라는 것이 주관적인 것이라서 보편적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이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구태여 왜 플라스틱 미인이라도 되고자 하는 수  많은 여성들이  성형외과를 들락날락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미에 대한 아주 고전적인 이론을 빌려올까 한다. 나는 대학 4학년 때  <미학 개론>을 수강했었다. 전공과목에 비해 유달리 재미있었던 그 수업을 열심히 들었던 덕에 다행스럽게도 그 때 주워들었던 고대 그리스의 두 학자의 ‘미’에 대한 정의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미는 크기와 질서에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질서란 비례와 균형을 갖춘 통일적 아름다움을 뜻하는 것이고 크기란 제한된 크기의 대상만이 편안하게 감상될 수 있고 감각과 정신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왕이면 전체가 명료하게 감지되는 경우라면, 보다 긴 것이 그 길이에 비례하여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된다는 주장이다. 즉 고대의 철학자에 의하자면 아주 오래 전에도 아름다움에는 이상적인 것이 존재한 셈이다.

 

  또한 플라톤은 미(칼로스:kalos)와 선(아가톤:agathon)이 하나가 된 상태로서 칼로카다티아(kalokagathia-아름답고도 선하 것)이라는 이상을 내세웠다. 그에 따르자면 아름다운 것을 신봉하는 우리의 자세는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BC5 세기경 살았던 대학자의 주장도 이 천 오백년이 지난 짝퉁이 오리지널을 능가하는 이 시대에도 통용된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인생에 유용하고 목적에 합치되는 것이 선인 동시에 미라고 여긴 것은 비단 서구의 고대인들만은 아니다. 회의문자인 한자에서 아름다울 미(美)는 양 미(羊) 자와 클 대(大)자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이다. 이처럼 고대 중국인들에게도 아름다움이란 ‘살찐 양’처럼 통통하고 먹음직하고 복스러운 대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아름다운 존재를 신에게 바치는 희생양으로 제단에 바쳤으니 그들에게는 더 없이 유용하고 합목적적이고 선한 존재가 되어주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양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편 아름다움이 선(善)의 개념에서 떨어져 나오는 데는 근대의 철학자 엠마누엘 칸트의 도움이 컸다. 그는 아름다움의 쾌감은 일반적인 쾌락과 마찬가지로 속박도 없고 명령도 없이 사람의 마음속에 형성되는 만족감이라고 보았다.  덕분에 아름다움이 선이나 유용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쾌락에 대한 판단이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라면 미적인 판단은 도덕법과 같은 보편적 승인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도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며 덧붙였다.

 

  칸트의 정의대로라면 미에 있어 보편적 만족 요건을 제시하기 위해서 역사는 늘 아름다운 모델을 필요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7년 만의 외출’에서 지하도에서 날아든 바람에 활짝 퍼진 치맛자락을 붙잡고 순진한건지 요염한건지 잘 분간되지 않는 미소를 짓던 마릴린 먼로의 도톰한 입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흑인 하녀에게 자신의 코르셋을 더 바짝 조이라지만 정작은 부러질 듯 가녀린 비비안 리의 허리, 그리고 ‘경멸’의 오프닝에서 장 뤽 고다르 감독이 나신의 부분들을 열거했을 만큼 완벽한 각선미를 보여준 브리지트 바르도의 다리. 이 모두는 시대가 제시한 보편적 만족의 미의 기준들이며 그녀들은 미의 화신처럼 전 세계 여인들이 닮고 싶은 미의 전형이기도 했다. 하지만 옛날 영화 속에나 살아있는 지난 시대의 미의 여신들일 뿐, 오늘날 그 누가 이들의 사진을 들고 성형외과를 방문한단 말인가? 이제는 장 쯔이의 갸름한 턱, 황 신혜의 오똑한 코, 김 태희의 서글서글한 눈매처럼 해달라는 터무니없는 견적서를 만드는 때가 아니던가?  정말이지 시대에 따라 보편적 미인의 기준은 참으로 많이 변한다.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Willendorf)의 <비너스> 조각상의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는 다산과 생식을 상징하는 주술적 의미로 볼 수 있고, 그리스 밀로스 섬에서 발견된 밀로의 8등신 미녀 <비너스>의 글래머는 그리스 고대 미학의 요구대로 크기와 조화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다로 던져진 우라노스의 남근 주변에서 생긴 바닷물의 거품 속에서 탄생한 미의 여신 비너스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 보티첼리에 의해서는 10등신으로 더욱 이상화되어진다. 당시 피렌체 최고 미인 시모네타란 여인이 모델이었다고 하는데, 그녀가 10등신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키 크고 얼굴 작은 여인이 르네상스 미인의 이상형임을 보여주는 그림인 셈이다. 그럼 그 시대의 미인 얼굴은 어떨까? 르네상스 시대의 미인 중 최고로 대우 받고 있는 <모나리자>를 통해 볼 때, 당시의 미인은 이마가 높고 입술은 비교적 얇고 신비스러운 미소를 짓는 젊은 여인이어야 했던 것 같다. G. 포지란 사람의 조사에 따르면 이 작품 속의 여인은 피렌체의 안토니오 마리아 디 놀드 게라르디니의 딸로, 그녀 나이 24에서 27사이에 작품 모델을 섰다고 한다. 그녀의 민 눈썹을 두고 별별 추측이 다 있어 왔는데, 당시 피렌체에서는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여성들이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이었다는 설이 있다.

 

  미인의 전형적 기준은 시대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장소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가 있는 듯 싶다. 올해 5월 간송 전 형택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열린 간송미술관 특별전에는 조선시대 미의식을 보여주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전시되었다. 과연 조선 시대의 미인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한참동안이나 <미인도> 앞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세세한 부분을 놓칠세라 열심히 보았다. 비단 위에 그려진 미인은 삼단같이 윤기 나는 트레머리를 하고 한 쪽에 자줏빛 댕기를 살짝 하고 있다. 자주고름에 달린 수마노 삼작 노리개를 매만지는 여인의 손은 작으면서도 희다. 좁고 동그란 어깨는 가녀리고, 촘이 짧은 삼회장 저고리 밑으로 살짝 드러나는 겨드랑이의 하얀 속살이 눈부시다. 동그랗고 자그만 얼굴이나, 제법 통통한 볼 살이 있다. 작고 빨간 입술은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나 가느다란 실눈썹과 외꺼풀의 긴 눈과 조화를 이룬다. 백옥 같은 하얀 피부 때문인지 귀밑 잔 머리털은 더욱 애살스럽다. 정면을 직시하지 않고 살포시 빗겨 시선을 두고 있는 여인, ‘우리 시대에 그대로 환생한다면.... ’ 어휴! 나는 결코 조선 후기 어느 선비의 소첩일지 모를 저 여인의 미모가 그다지 부럽지 않았음을 솔직히 고백하련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대의 이웃 일본 미인은 어떤 모습일지 우키요에를 통해 살펴보자. 오른쪽의 그림은 기타가와 우타마로가 그린 <유명한 미인, 아카쓰타야의 아카기메>란 제목인데, ‘오이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붉은 빛깔 바탕에 아래쪽은 벚꽃이 그려진 기모노를 입고 있는데, 검은 오비를 앞쪽으로 맨 것으로 보아 게이샤가 아닌 유녀(遊女) 오이란인 듯 싶다. 몸통이나 발끝은 소매가 긴 기모노에 감싸 두었기 때문에, 아주 살짝만 그녀의 왼 손이 화폭 끄트머리에서 겨우 보인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자신의 산문 󰡔그늘에 대하여󰡕에서 언급한 대로, ‘옛날 일본 여자는 목덜미부터 그 윗부분과 소맷부리부터 그 끝만 존재하고, 다른 것은 모두 어둠에 숨어 있었던 것’(󰡔그늘에 대하여󰡕, 47쪽, 다니자키 준이치로 저, 눌와)을 확인시켜주듯, 유일하게 맨 살이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는 사슴처럼 길고 우유 빛처럼 하얗다. 조선 미인이 통통하고 동근 얼굴인데 비해 일본의 미인은 얼굴선이 길고 턱이 뾰족한 편이다. 눈 꼬리는 위쪽으로 향해있고  눈썹과 이마 위의 머리카락은 서로 닿을 듯 말 듯 좁은 이마가 무척이나 갑갑하게 느껴진다. 

 

  눈썰미가 꽤 좋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요즈음 나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나 배우들을 구별하기 힘든 경우가 왕왕 있다. 그들이 같은 사진을 들고 같은 병원에 가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마치 <존 말코비치 되기>의 포스터처럼 같은 얼굴이 여럿이 화면 속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환영을 보게 된다. 어쩌면 전부 비슷한 가면들을 구입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제는 개성적인 마스크를 가진 미인을 찾는 일이 쉽지가 않다. 아름다움의 ‘전범’은 이제 아주 빠른 속도로 변화된다. 그 사이클이 이제는 채 5년도 안 되듯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판에 박힌 모방을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영원한 진실로 착각하며 새로운 ‘페이스 오프’를 주기적으로 시술받는 그녀들에게서 플라스틱 냄새가 난다. 이러다 진짜 자기 모습은 사라지고 가면 1, 가면 2, 가면 3,.....의 새로운 모습으로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처럼 부패하지 않는 육체를 가진 미녀들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지 두렵기조차 하다.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 떠난 꽃 한 송이의 여행

 

  자신의 외피만 변화되면 자신의 내면세계에도 충요로와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닌 듯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나만의 색깔은 무시한 채, 남들의 빛깔만을 부러워하던 자존감이 매우 낮은 꽃 한 송이가 있었다. 이란의 망명 작가 사이드가 글을 쓰고 체코 프라하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그림책 작가인 크베타 파코브스카가 빨강ㆍ파랑, 노랑의 강렬한 원색을 기하학적 형태로 배치한 그림을 선보인 아주 독특한 그림책 속이 꽃 한 송이가 바로 그녀이다.

 

 어느 정원에 빛깔이 없는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알록달록한 색을 뽐내고 있는 꽃들 사이에서 이 빛깔 없는 꽃은 슬퍼한다. 그런 그녀는 어느 날, 무지개가 뜰 때면 무지개 나비가 나타나 꽃들에게 제각각 아름다운 빛깔을 나눠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분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이어서 정원을 지키는 파수꾼이 무지개 나비를 잡아 괴롭힌 적이 있어 이제 무지개 나비는 그녀가 사는 정원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듣게 된다.  어느 비 내리는 수요일, 체념만 하면서 빛깔도 없이 살고 싶지 않던 그녀는 스스로 무지개 나비를 찾아 나설 생각으로 정원을 살금살금 빠져나왔다. 멀리 가지도 못한 그녀는 빛깔 없는 꽃들의 통행을 엄중히 금지하는 법에 따라 경찰관에 제지당한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지금 빛깔을 찾아 나선 길이라고 설명하고, 가능한 빨리 자신의 빛깔을 찾아 보여주겠다며 약속하고 나서야 다시 길을 떠날 수 있게 된다. 

 

남들처럼 예쁜 빛깔을 갖게 되리란 부푼 꿈을 안고 떠나온 여행이었지만, 어디에서도 무지개 나비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광장에서 멋진 빛깔의 플라타너스와 빨간색 풍선을 차례로 만나 어떻게 예쁜 빛깔이 생겨났는지 묻는다. 그러나 자신들의 외모에는 관심이 없는 그들은 코웃음을 치며, 혹시라도 무지개 나비를 보았느냐는 질문 따위에 무성의하게 답한다. 무지개 나비를 찾아내어 자신만의 빛깔을 갖고 싶었던 그녀는 힘이 빠졌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녀를 지나던 어떤 할아버지가 발견한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녀는 용기를 내어 지금까지 겪은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죄다 털어 놓는다. 빛깔 없는 꽃인 그녀의 이야기를 조용힌 듣고 있던 할아버지는 외투를 열어 그 안에 있는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꽃밭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꽃밭 안으로 그녀가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전히 빛깔을 나눠준다는 무지개 나비를 찾고 있던 그녀가 해바라기에게 물었다. “너 무지개 나비가 어디 있는 줄 아니?” 그런데 해바라기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네 빛깔은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이제껏 자신에게는 아무런 빛깔이 없다고만 생각한 그녀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하며 수줍기만 했다. 그러자 해바라기가 그녀에게 제안을 한다. “넌 네 빛깔이 마음에 안 드나 보구나. 우리 바꿀래?” 처음으로 자신만의 색깔에 자신감을 갖게 된 그녀는 이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신 있게 대답한다.  “아니, 난 내 빛깔이 좋아!”라고.

 

 자신만의 빛깔, 즉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이란 출신의 작가 사이드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주제라고 한다. 종교 분쟁을 피해 독일로 망명한 작가는 이 이야기 속에 자신의 경험을 모두 집약해 놓았다. 스스로 색깔이 없다고 생각했던 꽃이 울타리를 넘어 경찰관과 플라타너스를 만났던 마을은 정치적ㆍ종교적 압박이 여전한 자신의 조국 이란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또한 할아버지가 꽃을 데려간 정원은 작가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개인이 자신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행복해질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의 역할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 작가인 사이드의 철학인데, 그가 독자들에게 󰡔꽃 한 송이가 있었습니다󰡕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개성’의 중요성은 그 어떤 그림책 작가들보다 또렷한 개성을 갖고 있는 크베타 파코브스카의 그림을 통해 더욱 명징하게 표현된다.

 

크베타 파코브스카는 빛깔 없는 꽃이 그토록 만나고자 갈망했던 무지개 나비를  두 팔을 활짝 펼치고 마음껏 날 수 있는 유혹적인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주인공 꽃이 얼마나 이 나비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를 시각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장면이다. 또한 자유를 억압하는 경찰관의 모습을 불분명한 형태의 도형으로 흐릿하게 표현한 것은, 몰개성한 전제적 사회의 회색빛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그림책에서 주목해서 봐야하는 것은 빛깔이 없다고 스스로 믿고 있던 꽃을 투명한 트레이싱지로 표현한 점이다. 아무런 빛깔도 가지지 못한 꽃이 할아버지의 정원 속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트레이싱지로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그 꽃은 자신만의 개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존감이 낮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트레이싱지를 앞 쪽으로 넘기면서 그녀는 이미 투명한 존재 자체로서 이미 세상의 모든 빛깔을 그대로 투영할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임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게 된다. 이처럼 파코브스카의 그림들은 화가로서의 상상력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이 듬뿍 담긴 작품으로 표현되면서도, 어디까지나 글 작가 사이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철학과 이야기 구조를 튼튼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처럼 책의 지면 속에서도, 그림책을 만드는 두 작가가 작업을 하는 모습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소유하는 것의 중요성’과 ‘내면의 개성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라는 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질적 개성이 조화롭게 공존할 때 비로서 각자의 개성은 빛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무지개 나비를 찾지 못한 꽃 한 송이가 개성이란 외부에서 주는 것이 아닌 자기 안에 숨겨진 것이란 것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의 마음을 거울에 비춰봐야만 한다.

 

바람둥이 리스트의 12가지 개성을 모은 곡

 

  음악사에서 헝가리 태생의 리스트(1811~1886)만큼 여성들과의 화려한 염문을 뿌리고 다닌 사람은 없었다. 금발에다 호리호리한 몸매이면서도 고혹적이며 귀족적인 분위기까지 갖고 있는 그의 용모에 이끌려 19세기 유럽의 숙녀들은 리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벌떼처럼 공연장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리스트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자 공연이 끝나면 무대 위로 뛰어올라 리스트가 일부러 피아노 위에 떨어뜨려놓고 간 녹색의 벨벳 장갑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고 하니, 현대판 록 스타와 광적인 팬들의 전형은 이미 19세기 초반에 리스트와 그의 여성 추종자들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대단히 신앙심이 깊어 훗날 로마카톨릭의 수사가 되기도 했지만 리스트는 자신의 빼어난 미모와 음악적 재능을 밑천으로 자신을 숭배하는 많은 숙녀들을 유혹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와 열애설이 있다고 세상에 알려진 여인들만으로 목록을 작성한다고 해도 다음과 같이 요란하다.  그의 나의 열일곱 살 때의 첫 사랑인 카롤린드 드 생 클릭을 시초로 하여, 아델르 라프뤼나 레드 백작부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 마리 뒤플레시스, 롤라 몽테즈, 마리 플레이엘, 마리아 파블로브나, 그리고 그의 필생의 반려가 된 카롤린느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으로 이어진다.(󰡔음악가와 연인들󰡕, 69·70쪽, 이덕희저, 예하)

 

확실히 빼어난 미모는 여성이고 남성이고를 떠나 이성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비상한 힘이 된다는 것을 리스트의 경우로도 알 수 있다. 리스트의 미모와 재능을 알아보는 여인들뿐 아니라 리스트 자신도 그에 부응하는 탁월한 심미안을 갖고 있어서, 단 1 퍼센트의 상이성만으로도 여성들이 빚어내는 미의 변주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마치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의 바람둥이 신경외과 의사 토마스가 수많은 여성편력을 갖게 된 이유처럼 리스트도 어쩌면 1 퍼센트의 상이성이 가져올 또 다른 로맨스의 환상을 실제로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들의 개성이란 아주 색다른 것에 기반을 두지 않는 듯하다. 적당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메스를 얼굴에 들이댄 결과, 조금 콧날이 높아지면 더 날카롭게 보이고, 조금만 더 눈이 커지면 시원시원해 보일 수 있듯 아주 미세한 차이만으로도 커다란 미적 변화가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가 잠시 딴 길로 빠졌는데, 그 자신이 빼어난 피아노 연주자이면서 6백곡이 넘는 피아노 작품을 작곡하기도 한 리스트의 피아노 곡 중에서 가장 압권은  <초절기교 연습곡 - 12 Etudes D'execution Trascendante S.139>가 아닐까 싶다. 이 연습곡들은 무려 25년 이란 시간을 들여 여러 번 수정하고 1851년에야 최종판을 출판된 그의 피아니즘에 있어 정점에 위치한다. 모두 12곡으로 구성된 <초절기교 연습곡>은 바이마르 시대에 작곡된 작품으로,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그의 탁월한 피아노 실력을 유감없이 펼쳐 보여주는 난곡들이다. C장조의 첫 번째 전주곡(Prelude)에서 Bb 단조의 열두 번째 곡, 눈치우기(Chasse neige)까지 최종판 출판을 위해 리스트 자신이나 출판사가 붙인 재미있는 이름들이 붙어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셋 잇단음으로 말발굽 소리를 묘사하고 있는 ‘마제파’, 깜박이는 불로 길 가던 사람을 홀리는 도깨비불을 연상케 하는 트레몰로형의 반음계진행이 도드라지는 ‘도깨비불’, 밤의 정경을 시적 정취가 넘치는 인상적 선율로 표현한 ‘밤의 선율’, 눈 치우는 모습이 계속 주요 선율을 색칠하며 전 곡의 종장을 담당하는 ‘눈치우기’ 등이 그것들이다. 상이한 개성을 갖고 있는 이 곡 중에서  어떤 곡이 가장 마음에 드는지는 듣는 사람의 개성에 따라 다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느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듣느냐에 따라서도 선호하는 곡은 달라질 수 있다.

 

  이 곡의 음반에 있어서, 나는 역시 헝가리 태생의 피아니스트인 조르주 치프라(Georges Cziffra)의 연주를 권하고 싶다. 그는 1955년에 조국 헝가리에서 리스트상을 받았지만, 50년대의 정치적 혼란과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프랑스로 망명했다. 치프라의 연주는 정통 리스트의 후예라 칭해지는 이름에 걸맞게 스케일이 크면서도 경이적인 테크닉으로 유명하다. 강인한 팔 근육과 잘 단련된 손가락으로 예리하고 깨끗하게 미세한 음의 변화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다혈질적 성격으로 가끔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아쉬운 면도 보여주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대부분 모노럴 레코딩이지만 그의 전성기 시절의 녹음을 담고 있다. EMI France에서 리마스터링해서 리스트의 다른 명곡인 <헝거리안 랩소디>,<메스트토 왈츠><발라드> 등의 곡과 함께 5개의 CD로 구성되어 있는 음반으로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로서의 그의 면모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혹자는 헝가리인 리스트의 곡을 역시 헝가리 출신인 치프라가 연주하므로 헝가리인만이 가질 수 있는 토속적 색체가 진하게 풍기는 연주라고도 하고, 또 혹자는 서정성보다는 힘과 다이나믹함에 중점을 두어 서정성에 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혹시라도 서정적인 연주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연주를, 완벽한 기교의 연주를 듣고 싶은 분이라면, 소위 ‘리스트의 초절 기교는 베르만’이라는 등식의 성립을 만든 장본인 라자르 베르만의 연주를, 포효하는 힘을 원하는 분이라면 ‘건반 위의 사자’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연주를 들어보면 좋겠다. 자신이 어떤 개성의 연주를 좋아하는지를 깨닫기 까지는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 자신이 어떤 성향의 곡을 좋아하는지 역시 직접 들어보거나 연주해보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 이런 전제하에 볼 때, 그렇다면 리스트는 자신이 사귄 수많은 여인 중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인데, 불행이도 우리는 고인이 된 리스트에게 채근할 수 없다.  아무튼 자신의 취향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경험과 자아성찰이 기본이 된다. 하지만, 이런 저런 얼굴과 몸매로 뜯어고쳐도 자꾸만 성형외과를 찾게 되는 여인들은 이제는 자신의 본연의 모습이나 개성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망각한 상태는 아닐련지. 이상한 가정이 되겠지만, 리스트가 만난 여인들이 한결같이 만약 같은 얼굴에 같은 몸매를 지니고 비슷한 사고와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리스트의 호기심도 발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리스트의 호기심의 정신을 계승해서 자기 안의 다양한 자기 모습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내면 탐구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련지....

 

Written by 김영욱님·김영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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