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진짜 캐릭터와 사회적인 캐릭터가 전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사람들의 눈에 뵈는 내 캐릭터라는 것이 좀 맹~ 해 보이나 보지? 그녀가 너무 순진하고 맹 해서 자신의 '작업 싸인'을 못 알아 들은 것 같은데, 갑자기 저돌적으로 나갔다가는 그녀가 놀랄 것 같단 푸념 반 자랑 반인 소리를 고민이랍시고 많이 들었다. “그녀는 연애에 대해선 잘 알지도 못하고 그냥 순진하게 웃기만 해. 내 감정을 돌려 말하면 알아 듣질 못해, 솔직히 직설적으로 말해도 못 알아 들어.” 그러면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거기 너, 헛물 켜고 있구나.” 그냥 지나치기 안타까워서 충고 하는 경우도 있다. “니가 생각하는 그녀는 니 생각만큼 그렇게 순진하진 않을 걸?” 그래 봤자 한결같이 내게 돌아오는 답은 뻔하다. “니가 그녀를 몰라서 그래.” 조목조목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내 순진 가면 벗겨질까 봐 참았다.
사람이라는 게, 특히 남자들 같은 경우는 호감을 느끼는 그녀가 심히 순진하고 맹 해 보이면 도와주고 싶고 챙겨 주고 싶고 한 모양이다. 여자의 경우는 불쌍하고 상처받은 남자가 모성본능을 자극한다고 하는데 그럼 남자의 이런 심리는 대체 뭘까. 하여튼 도도하고 자기 할 일 똑 부러지게 하는 여자보다야 좀 맹하고 일 잘 못하는 여자가 남자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는다는 것은 내 지난 날 경험률로 익히 깨달았다. 남자들한테 맹하고 순진하다,소리 듣는 것에 자존심 상할 나이는 이미 지났다. 좀 편해 보려고 하기 싫으면 못하는 척 귀찮으면 까먹은 척 하는 것에 도통 익숙해졌다.
이건 작업 들어오는 남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은 나한테 애인이 될 수 없는데, 내가 좋다고 하시니 마음은 감사하오나 거절하겠사와요, 하면 잘 지내던 관계도 어색할 것 같아 나는 못 알아 들은 척 다시 한 번 순진 가면을 쓴다. 남자들의 돌려 말하기란 뻔해서 기껏해야 우회전 좌회전 한 방인데 그 정도도 못 알아 들으면 그거야 말로 무뇌아지. 딱 잘라 거절해봐도 나한테 이득 될 게 없으니 모르는 척 무슨 말이야, 하고 눈 몇 번 깜박여 주면 남자들의 패턴은 둘 중 하나다. 좀 더 천천히 시간을 두든지, 제풀에 지쳐 포기하던지. 하여튼 타이밍의 위기상황은 넘긴 셈이다.
싫은 사람 단칼에 잘라내지 않고 그냥 두면 피곤하지 않느냐고? 글쎄, 인기만발 퀸카도 아니고 지금 내가 싫다고 해서 이 타이밍 지나간 순간에도 내가 싫어진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일단 미래를 위해 세이브 해 놓는 셈이지. 제 풀에 지쳐 포기하면 그걸로 또 그만이고. 딱 잘라 거절 하는 것보다 욕 안 먹고 내 캐릭터 지키고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이득 남는 장사 아닌가.
순진하고 맹 해 보이니 사람들에게 만만해 보이는 것은 취약점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내 주변 남자들이 만만하게 보는 것은 지들이 만들어 낸 내 캐릭터지, 실상 나는 그들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고 앉아 있으니 그것도 참을 만 하다. 그들이 기껏 날 만만하게 생각하는 거라고는, 순진해서 좀만 제대로 남자답게 작업 걸면 넘어오겠다 하는 생각과 일 맡겨도 제대로 안될 것 같다는 지들 생각과 판단이다. 그래서 나한테 작업 걸어도 난 절대 잘 넘어가지 않고(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남이 시킨 일은 못해도 내 떡은 알아서 잘 챙겨 먹으니 그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내 떡 잘 챙겨 먹고 있는데 떡 못 먹고 있다고 자기 떡 나눠 주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 없잖아?
오래 살진 않았지만 내 캐릭터가 벗겨진 것은 딱 한 명의 남자 뿐이었다. 그 친구는 너무 선수라 두 세 번 만나 보고 내가 알면서 모르는 척 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덕분에 그는 짧은 내 인생에 만난 유일한 선수로 인정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선수가 아니니까 선수들까지 속이는 가면까지 쓰고 살고 싶진 않다. 그냥 보통의, 적당히 속물이고 적당히 여자 좋아하는 남자들에게만 먹히면 충분하다.
아, 여자들한테는 안 써먹느냐고? 나름 써먹긴 하지만 효과는 없는 것 같다. 도통 동성에게는 가차없이 친절이나 매너를 베풀지 않으니까. 남자 앞에서만 쓰고 여자들 앞에서 안 쓰면 그건 사회적인 가면이 아니라 내숭이니까 나는 내숭 떠는 여자보다는 사회적인 여자가 되고 싶다. 나한테 속아 넘어가며 잘해주는 남자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절대 네버! 요새 남자들은 속물이고 또 약아 빠졌으니까. 자기들도 나를 챙겨 주며 어느 정도의 기쁨이나 뿌듯함을 누리는 데 굳이 내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도움을 받고 그들은 기사도에 뿌듯해 하고, 기브앤 테이크다. 정말 미안해 할 정도로 잘해주는 남자를 만나면 또 몰라, 홀딱 반할지.
여기까지 읽었는데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진한 그녀, 아직도 당신은 그녀가 순진하다고 생각하는가? 순진하다고 생각하고 챙겨 주는 것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대신 순진하다고 금새 당신의 손 안에 굴러 떨어질 거라 방심하지 마시길.
연애는 긴장감이다. 방심은 곧 실패. 순진해 보이는 그녀가 순진하지 않다고 가면 벗으라고 날뛰지는 말아라. 당신이 날뛴다고 벗겨질 가면이었으면 진작에 벗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