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정리함

탈이념의 시대, 그 자리를 대체한 이념은?

서나노야 2006. 9. 18. 09:30
바야흐로 탈(脫)이념의 시대라고들 한다.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의미가 없고, 다들 중도를 좇는다. 사람들은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에는 이골이 났다. 진절머리를 친다. 전세계적으로 이념의 퇴조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 지적되곤 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인기를 끄는 ‘주의’(ism)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용주의가 그것이다. 사회주의나 민주주의도 ‘실용’을 위한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실용을 위해서라면 인간마저 도구화할 수 있다. 실용주의만큼이나 현대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또 하나의 주의, 외모지상주의는 여기에 기인한다.

사실 외모지상주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떤 종류의 ‘주의’보다도 훨씬 오래되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좋아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지역에 있어왔다.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는가. 하지만 외모지상주의ㅡ루키즘(lookism)ㅡ이란 용어는 2000년 한 미국 언론인이 언급하고 난 뒤에서야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외모지상주의가 예전에 비하여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화되었기 때문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뭔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유는 외모지상주의가 실용주의와 결합하였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 냉전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싸움에서 자본주의가 승리를 거둔 뒤, 자본주의는 그 견제장치를 잃어버렸다. 천민자본주의로 흐른 것이다. 실용주의의 ‘실(實)’은 돈이다. ‘실용주의’란 용어는 자본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을 위해, 자본주의를 미화하고자 만든 단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외모는 돈이 될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우리는 공부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계발하는 데에 온갖 노력을 투자한다. 외모에 집착하며 외모를 가꾸려는 노력은 그 중 하나이다. 그리고 비교적 손쉬운 방법이다. 좀 더 나은 외모를 가진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좀 더 나은 상품가치를 가지며, 이 상품가치를 높이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 역시 돈이 된다.

<뷰티21>에서 ‘21’이란 숫자는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현대 자본주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TV광고는 이 영화의 주된 소재 중 하나이다. 빠른 시간에 쉽게 즐기려는 현대인의 욕망이 원나잇스탠드라는 형태의 성 생활로 나타나는 것도 이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한데 묶는 것이 바로 외모지상주의와 그를 부추기는 ‘뷰티21’이라는 화장품이다. ‘21’은, 21세기ㅡ그러니까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현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전에 인권을 주제로 한 영화 <여섯 개의 시선> 중 <그녀의 무게>란 단편을 보았다. 학생들 사이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몸무게를 두고 모욕 혹은 칭찬을 공개적으로 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다. 면접 때 외모와 관련한 농담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대상은 여성이었다. 영화는 그 순간 순간을 일상 그대로 묘사하고 있었다. 외모지상주의의 일상화, 현대 사회는 이미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