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정리함

<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

서나노야 2006. 9. 18. 09:30
의도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좋건 싫건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토론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한번쯤 상대방과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적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이성을 잃은 나머지(뚜껑 열려버린 나머지) 토론에서 불리하게 된 기억이 더 생생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 좋지 못한 성격과 토론능력 탓에 그런 기억이 많았던 내가 이 책을 꺼내든 것도 ‘(토론)기술을 통한 무장’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책 표지에 나와 있는 수많은 ‘꼴통’의 사례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 종교, 미신, 비전, 열광, 교조, 정통, 이단, 도를 아십니까?, 예수천국 불신지옥, 님은 짜장면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조국은 하나다, 주석궁에 태극기를!, 경제도 어려운데, 거품을 문 심야의 논객, 그리고 우리 사장, …’은 나와 토론해야 할 버거운 상대인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책에서는 그 ‘꼴통’들을 각개격파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해주지는 않는다. 책은 맨 처음에 논증 도식 몇 가지를 설명하며 에둘러간다. 그 다음에 우리에겐 친숙하지 않은 중세 서구 사회의 종교 재판 논쟁을 소재로 삼아, 지금 그것이 꽤 보편적으로 옳지 않다고 여겨질 수 있기까지 어떤 논증 방법이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았다.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해주지는 않았지만, 나는 여기서 다루고 있는 토론 기술을 통해 우리 주변에 엄존하고 있는 각각의 ‘꼴통’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사실 저자가 목표한 것도 마르크스주의나 이스라엘, 미국, 이라크, 이슬람 근본주의 등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고, 옮긴이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한국 사회의 꼴통들, 은근하게, 하지만 철저하게 그들을 몰아낼 방법을 모색한다.’는 의도를 적고 있으니 말이다.
이쯤 해서 책에서 말하는 ‘꼴통’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각 독자의 정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꼴통은 광신도, 그러니까 어떤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인 가치라고 여기며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교조주의자(근본주의자)를 의미한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 바로 중세 서구 사회의 종교 재판을 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는 내내 불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중세 서구 사회의 종교 재판을 옹호하는 논거는,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이 설교와 전도를 하면서 내놓는 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첫 번째였다. 게다가 나는 종교 재판이 나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확고한 사실이라고 머릿속에 막연하게나마 생각해왔는데,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종교 재판 옹호 논거에 고개를 끄덕여가고 있었다. 이른바 크리스트교가 소유하고 있는 진리는 그와 다른 모든 거짓된 교리들과는 특수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과, 사람보다 신에게 더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세례를 받은 후 이제까지 크리스트교 신자로서 생활한 나 역시―비록 그것이 종교 재판 옹호처럼 위험하지는 않을지라도―꼴통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꼴통 잡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도리어 내가 꼴통임을 확인한 것은 꽤 좋은 경험이었다. 자신이 꼴통임을 깨닫지 못하고 토론에 임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런 경우 본인에게도 토론 상대방에게도 건전하고 생산적인 토론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크리스트교 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맹목적인 신앙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나 같은 꼴통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교화’되었느냐의 문제다. 비록 그 강도가 약했을지라도 어느 정도의 크리스트교 교조주의자였던 내가, 크리스트교를 유연한 사고로 바라볼 수 있게 한 원인은 어디 있었을까? 책은 교조주의자들의 논거를 계몽가들이 어떻게 반박했는지를 보여준다.
교조주의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을 때, 계몽가들이 애용한 것은 내재적 비판이었다. 이는 기본전제의 공유에서 시작한다. 크리스트교의 경우 성경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지만, 기본전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논쟁은 평행선을 긋고 꼴통들의 의식 변화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이 책에 인용된 그들의 논쟁을 보던 나 역시도 양쪽의 주장에 똑같이 공감하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었다. 게다가 기본전제의 계속된 해석은 상당히 따분하다. 대중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세부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기본전제의 부정에 있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고, 과격하다는 인상을 가지게 한다. 성경을 부정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럴 때의 반응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이를 책에서는 ‘뒤엎는 논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계몽이란 비판과 반대 이데올로기 설파가 아니다. 언제라도 다시 비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확고한 논거가 없듯, 그에 반대하는 논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오히려 계몽의 정수는, 공격하는 대상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참된 사실 자체를 그저 가져다가 보여주는 것이다. 이른바 폭로다. 폭로는 사실에 바탕하기 때문에 다른 이가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특히 토론자 외부의 제 3자에게 그 영향력이 크다. 사실 자체를 외부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다수의 제3자들은 공격 대상 이데올로기를 어느 순간에 낡은 유물로 만들 수가 있다. 실제로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가들은 이 방법을 즐겨 사용하였고, 맑스주의의 반대자들이 맑스주의를 무기력화하려고 사용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크리스트교와 맑스주의가 꽤 이상적인 이데올로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내재된 비이성적 교조가 밝혀지는 순간 더 이상 예전만큼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동시에 꼴통들을 향해 화끈하게 웃으라고 말한다. 관용이나 캐리커쳐, 안경벗기, 허접하게 만들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마음이 편치 않다. 사실 이것들은 합리적인 이성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니체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태에 해를 입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일부러 당치 않은 근거로 방어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으니 말이다. 이성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토론에서, 어떤 이성적인 논거들보다도 이러한 비이성적인 토론 ‘기술’이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사실이 아니다. 이런 기술을 사용하되, 그것이 이성적인 논거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역할만 했으면 좋겠다. 계몽가들이 이 기술을 사용했을 때는 모르겠지만, 교조주의자들이 이 기술을 사용한다고 생각해 보라. 끔찍한 일이다. 사실 이러한 기술이 어떠한 것인지 잘 판단하는 것 역시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키는 데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맞다, 볼테르의 말처럼 인간은 너무도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라서, 교조에 물들어버린 꼴통이 되기 쉽다. 그리고 교조주의자들이 슬그머니 특정 비이성적인 교조를 덜 강조하게 되는 ‘코카콜라 신드롬’ 같은 현상도 일어난다. 특히 평화가 찾아오면 거론하고 싶지 않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것이 지금 현재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어설프게 그 교조를, 그 교조로 일어난 만행을 용서하거나 용인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역사를 생생하게 유지하고, 은폐의 의례에 끊임없이 손가락질을 해야 한다. 불편하거나 지겹더라도 다음 세대에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작금의 친일 청산이 왜 중요성을 가지는지 곱씹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큰 소득이 되었던 것은 내가 무의식중에 꼴통이 되어가고 있음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체로 25살 정도가 되면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웬만한 충격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와 서로 다른 가치관에 대해 더 이상 기대를 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꼴통이 된다는 의미다. 약간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꼴통이 되지 않게 계속해서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가지기도 한다. 이는 앞으로 계속될 독서를 통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끝.




이하 독후감을 쓰는 데 모은 몇몇 자료들.
이데올로기의 전수, 어릴 적부터
볼테르가 즐겨 사용한 뒤엎는 논증,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단지 보여주어 생각하게 할 뿐. 다르게도 볼 수 있도록 해서 편협한 시각을 넓힌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겠소’ 상대방의 확신의 강도에서 한계에 부딪혀. 광신도의 열변에 대중들이 관심이 쏠리지 않게 해야. 결정능력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세대에 관심을 가져야.
진지하게, 웃어넘기게. 기법은 상대방의 권력과 위험성에 달려 있다.


코카콜라 신드롬 : 교조에서 슬그머니 어떤 내용을 뺀다. 반대파 다 죽이면 너희들끼리 살 수 있어? 우호적인 실천이 있다고 해서, 배후에 불관용적인 교조가 존재하고 있는 한 문제가 생긴다. 권력관계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전에 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당신들의 천국, 그들의 이상향 : 이데올로기 전체와 싸우지 말고, 상상 속에서 근본주의를 예측하자. (e.g. 반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세계혁명과 프롤 계급독재를 물고 늘어져.) 도덕적 치장 없이 서술한 바 있다.
잣대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 이슬람의 성전에 분노하면서 동시에 다윗 왕을 칭송하다.
단어바꾸기 기법을 사용하자. ‘종교재판’을 ‘기독교 박해’로, ‘홀로코스트’로 바꾸자.
원인을 한 개인이 아닌 시대 여건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시대상황의 희생자로 만들어 그 만행을 용서하거나 용인해서는 아니된다. 역사를 생생하게 유지하고, 은폐의 의례에 끊임없이 손가락질을 해야 한다. 불편하거나 지겹더라도 다음 세대에 미치는 효과를 위해서.
평화가 찾아오면 거론하고 싶지 않은 유혹에. 그러나 나중에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고전적 관용 : 틀렸지만 봐줘
뒤엎는 관용 : 누구 말이 맞는지 누가 알어?
뒤엎는 상대화 : 각자의 마음속에 각자의 진리가?
파안대소가 지닌 힘 : 신성한 장소(이데올로기)에 대한 경외감을 앗아간다.
캐리캐처 : 과장이 진리를 들어낸다. ex.종교재판->식인종
부드러움이 딱딱함을 이긴다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확고한 논거가 없듯, 그에 반대하는 논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