鄂渚南樓書事(악저남루서사) - 黃庭堅(황정견) -
鄂渚南樓書事(악저남루서사) - 黃庭堅(황정견) -
回顧山光接水光(회고산광접수광) 둘러보니 산 빛이 물빛과 닿았고
빙欄十里기荷香(빙난십리기하향) 난간에 기대니 가득한 연꽃 향기
淸風明月無人管(청풍명월무인관) 청풍명월에 피리 부는 사람 없고
倂作南樓一夜凉(병작남루일야량) 나란한 다락에 시원하기만 한 밤
* 황정견(黃庭堅, 1045~1105)
자 노직(魯直), 호 산곡(山谷). 홍주(洪州:江西省) 분녕(分寧:修水縣) 출생. 1066년 진사(進士)에 급제한 후 국자감 교수(國子監敎授)를 거쳐 각지의 지방관리를 역임하였다. 1086년에 비로소 중앙관직에 취임, 교서랑(校書郞)이 되어 국사편찬(國史編纂)에 종사하였다. 1095년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이 부활됨과 동시에, 구법당(舊法黨)인 그는 신법을 비난하였다는 죄목으로 검주(黔州:四川省 彭水縣)에 유배되었다. 1100년에 사면 복직되었으나, 1102년에 다시 무고를 당하고 의주(宜州:廣西省宜山縣)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았으며, 스승인 소식(蘇軾:東坡)과 나란히 송대(宋代)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그의 시는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지녔으며, 학식에 의한 전고(典故)와, 수련을 거듭한 조사(措辭)를 특색으로 한다. 강서파(江西派)의 시조로 꼽히며, 《예장 황선생문집(豫章黃先生文集)》(30권)이 있다. 서(書)에서는 채양(蔡襄) ·소식 ·미불(米)과 함께 북송(北宋)의 4대가(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는 단정하지만 일종의 억양(抑揚)을 지녔으며, 활력있는 행초서(行草書)에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