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김인겸)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김인겸
[1단락] - 일본에서 통신사를 청함
일생을 살아감에 성품이 어설퍼서 입신 출세에는 뜻이 없네. 진사 정도의 청렴하다는 명망으로 만족하는데 높은 벼슬은 해서 무엇하겠는가? 과거 공부에 필요한 도구를 모두 없애 버리고 자연을 찾아 놀러 다니는 옷차림으로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명산대천을 다 본 후에, 음풍농월하며 금강 유역에서 은거하고 지냈는데, 서재에서 나와 세상 소식을 들으니 일본의 통치자 토쿠가와 이에시게가 죽고 우리 나라에 친선 사절단을 청한다네.
[2단락] - 만조 백관들과의 작별 모습
이 때가 어느 때인고 하면 계미년 8월 3일이라. 경복궁에서 임금님께 하직하고 남대문으로 내달아서 관우의 사당 앞을 얼른 지나 전생서에 다다르니, 사신 일행을 전송하려고 만조 백관이 다 모였네. 곳곳마다 장막이 둘러쳐 있고 집집마다 안장을 얹은 말이 대기하고 있도다. 전후 좌우로 모여들어 인산인해가 되었으니 정 있는 친구들은 손 잡고 장도를 걱정하고, 철 모르는 소년들은 한없이 부러워하네.
[3단락] - 사신 일행이 출발하는 광경
석양이 거의 되니 하나하나 이별하고 출발 신호에 따라 차례로 떠나갈 때에, 절과 부월 앞을 인도하는 군관이 국서를 인도하고 비단으로 만든 양산과 순시 영기가 사신을 중심으로 모여 섰다. 나 역시 뒤를 따라 역마에 올라 타니, 때때옷을 입은 지로 나장이 깃을 꽂고 앞에 서고 마두서자가 부축하고 쌍두마를 잡았구나. 청파역졸이 큰 소리로 외치는 권마성은 무슨 일인가? 아무리 말려도 정해진 의식이라고 굳이 하네. 수염이 허옇게 센 늙은 선비가 갑자기 사신 노릇함이 우습고 괴이하니 남 보기에 부끄럽다.<중략>
[4단락] - 부산항 출발 광경
거센 바람에 돛을 달고 여섯 척의 배가 함께 떠날 때,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산과 바다를 진동하니 물 속의 고기들이 마땅히 놀람직하도다. 부산항을 얼른 떠나 오륙도 섬을 뒤로하고 고국을 돌아보니 밤빛이 아득하여 아무 것도 아니 보이고, 바닷가에 있는 군영 각 항구의 불빛 두어 점이 구름 밖에서 보일 듯 말 듯하다.
[5단락] - 바다 가운데서 폭풍을 만남
선실에 누워서 내 신세를 생각하니 가뜩이나 마음이 어지러운데 큰 바람이 일어나서, 태산 같은성난 물결이 천지에 자욱하니, 만 석을 실을 만한 큰 배가 마치 나뭇잎이 나부끼듯 하늘에 올랐다가 땅 밑으로 떨어지니, 열두 발이나 되는 쌍돗대는 나뭇가지처럼 굽어 있고 쉰 두 폭으로 엮어 만든 돛은 반달처럼 배가 불렀네. 큰 우렛소리와 작은 벼락은 등 뒤에서 떨어지는 것 같고, 성난 고래와 용이 물 속에서 희롱하는 듯하네. 선실의 요강과 타구가 자빠지고 엎어지고 상하 좌우에 있는 선실의 널빤지는 저마다 소리를 내는구나.
[6단락] - 바다의 장관
이윽고 해가 돋거늘 굉장한 구경을 하여 보세. 일어나 선실 문을 열고 문설주를 잡고 서서, 사면을 바라보니 아아! 굉장하구나, 인생 천지간에 이런 구경이 또 있을까? 넓고 넓은 우주 속에 다만 큰 물결뿐이로세. 등 뒤로 돌아보니 동래의 산이 눈썹만큼이나 작게 보이고 동남쪽을 돌아보니 바다가 끝이 없네. 위 아래 푸른 빛이 하늘 밖에 닿아 있다. 슬프다. 우리의 가는 길이 어디란 말인가? 함께 떠난 다섯 척의 배는 간 곳을 모르겠도다.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이따금 물결 속에 부채만한 작은 돛이 들락날락하는구나.
[7단락] - 폭풍에 시달린 끝에 대마도에 당도함
배 안을 돌아보니 저마다 배멀미를 하여 똥물을 다 토하고 까무라쳐서 죽게 앓네. 종사상은 태연히 앉았구나. 선실에 도로 들어와 눈 감고 누웠더니 대마도가 가깝다고 사공이 말하거늘 다시 일어나 나와 보니 십 리는 남았구나. 홰선 십여 척이 배를 끌려고 마중을 나왔네. 그제서야 돛을 내리고 뱃머리에 줄을 매어 왜선에 줄을 던지니 왜놈이 그것을 받아 제 배에 매어 놓고 일시에 노를 저으매 배가 편안하고 조용하게 움직여 좌수포로 들어가니 시간을 오후 3-5 쯤 되었고 짐을 실은 배는 먼저 와 있다.
[8단락] - 대마도의 풍광과 인가의 모습
포구로 들어가며 좌우를 둘러보니,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의 모습이 몹시도 아름답다. 소나무, 삼나무, 대나무, 잣나무, 귤유 등감 등이 모두 다 등청일세. 왜인 종자 여섯 놈이 검도정에 앉아 있구나. 인가가 드믈어서 여기 세집 저기 네집. 합하여 헤아리면 오십 호가 넘지 않는다. 집 모습이 몹시 높아서 노적더미 같구나.
[9단락] - 왜인들의 머리 치장과 옷차림
구경하는 왜인들이 산에 앉아 굽어본다. 그 중의 남자들은 머리를 깎았으되 뒤통수만 조금 남겨 고추상투를 하였고, 발벗고 바지 벗고 칼 하나씩 차고 있으며, 여자들의 치장은 머리를 깎지 않고 밀기름을 듬뿍 발라 뒤로 잡아매어 족두리 모양처럼 둥글게 감았고, 그 끝은 둘로 틀어 비녀를 질렀으며 노소와 귀천을 가리 않고 얼레빗을 꽂았구나. 의복을 보아하니 무 없는 두루마기 한 동으로 된 옷단과 막은 소매가 남녀 구별 없이 한가지요, 넓고 크게 접은 띠를 느슨하게 둘러 띠고 늘 쓰는 모든 물건은 가슴 속에 다 품었다. 남편이 있는 여자들은 이를 검게 칠하고 뒤로 띠를 매었고, 과부, 처녀 , 계집아이는 앞으로 띠를 매고 이를 칠하지 않았구나.<중략>
[10단락] - 강호(江戶)로 가는 도중 비를 만나 고생함
점심 먹고 길 떠나서 이십 리를 겨우 가서 날이 저물고 큰 비가 내리니 길이 끔찍하게 질어서 미끄러워 자주 쉬어야 하기에, 가마 멘 다섯 놈이 서로 돌아가며 고대하되 갈 길이 전혀 없어서 둔덕에 가마를 놓고 한참 동안 머뭇거리면서 갈 뜻이 없다. 사방을 둘러보니 천지가 어둑어둑하고 일행들은 간 곳이 없고 등불은 꺼졌으니, 지척을 분간할 수 없고, 넓고 넓은 들 가운데서 말이 통하지 않는 왜놈들만 의지하고 앉았으니, 오늘 밤의 이 상황은 몹시 외롭고 위태하다. 가마꾼이 달아나면 낭패가 오죽할까. 그놈들의 옷을 잡아 흔들어 뜻을 보이고, 가마 속에 있던 음식을 갖가지로 내어 주니, 저희들끼리 지껄이며 먹은 후에 그제서야 가마를 메고 조금씩 나아가는데 곳곳에 가서 이러하니 만일 음식이 없었더라면 필연코 도주했을 것이다. 삼경쯤이나 되어서야 겨우 대원성에 들어가니 머리가 아프고 구토하여 밤새도록 몹시 앓았다.
[11단락] - 강호의 번성한 모습
16일에 비옷을 입고 강호(동경)로 들어갈 때에 왼편은 마을이요, 오른편은 바다(태평양)로다. 산을 피하고 바다를 향해 있는 들판이 옥야 천리로 생겼는데 높은 누각과 집들은 사치스럽고 사람들이 번성하다. 성곽의 높고 장한 모습과 다리와 배의 대단한 모습이 대판성 서경보다 3배는 더하구나. 좌우에 구경하는 사람이 몹시 장하고 숫자가 많으니 어설픈 붓끝으로는 이루 다 적지 못하겠도다. 삼십 리 오는 길이 빈틈없이 인파로 이어져 있으니, 대체로 헤아려 보면 백만이 여럿이로구나. 여자들의 모습이 아름답기가 명고옥(나고야)과 한가지다.
[12단락] - 실상사에 묵으면서 그 곳에서 일어난 역사를 회고함
실상사로 들어가니 여기도 무장주일세, 처음에 덕천 가강(도쿠카와 이에야스)이 무장주의 태수로서, 풍신 수길이 죽은 후에 그 가계를 없애 버리고, 이 땅(강호)에 도읍을 정하여 강하고 풍요로우며, 일을 계획함이 신중 은밀하며 법령도 엄격하고 생각하는 것도 깊어서 왜국을 통일하니, 아무튼 제 무리에서는 영웅이라고 하겠도다. 덕천 가강이 죽은 후에 자손이 이어져서 이 때까지 누려 오니 복력이 기특하다. 17일에는 비가 개지 않아서 실상사에서 묵었다.<하략>
■ 주제 : 일본 여행에서의 견문과 여정(일본의 문물과 제도, 인물, 풍속 등)
■ 이해와 감상
조선 영조 때의 문인 김인겸의 작품으로, 영조 39년 조엄이 통신사로 일본으로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던 작가가, 출발해서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과 일본의 문물 제도, 인물, 풍속 등의 견문을 기록한 기행 가사이다. 영조 39년 8월 3일 한양을 출발하여 이듬해 7월 8일 경희궁에 들어가 복명(復命)할 때까지의 약 11개월에 걸친 긴 여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으로, 총 4책 8,000여 구나 되는 대작이다.
정확한 노정(路程)과 일시(日時)를 적고, 날씨, 자연 환경, 일어난 사건, 작자의 느낌 등을 과장 없이 그대로 묘사했을 뿐 아니라 도처에 날카로운 비판과 유머가 곁들어져 있어 기행 문학의 묘미를 십분 살려 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홍순학의 <연행가>와 쌍벽을 이루는 장편 기행 가사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