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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쇠고기를 고르라면 일본 소 ‘와규(和牛)’ 고기를 꼽는 사람이 많다. 세계 최고 수준의 육질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와규의 유전자 정보를 해독해 관리하고 있다. 더 좋은 육질의 품종으로 개량하기 위해서다. 최근엔 교잡종(交雜種)으로부터 와규를 보호하기 위해 와규의 정액을 지적재산권으로 보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유전자 미생물 등 생물소재(생물자원)의 보존과 해독이 중요한 국가자산으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은 육우(肉牛)산업의 경쟁력을 생물소재의 확보에서 찾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생물소재의 확보와 관리가 너무 허술한 것 아니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과학계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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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 몰린 한국의 생물소재
아무리 획기적인 연구기법을 알고 있어도 연구소재가 없으면 연구를 진행할 수 없다. 생물소재는 인체조직 종자 미생물 세포 유전자 등 각종 신약 개발과 식량 개량을 위한 연구재료로 쓰이는 생물자원을 말한다.
무심코 지나치는 들풀이나 해조류 곤충 등에도 질병치료에 유용한 물질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렁이 배 속에는 핏덩어리(혈전)를 녹이는 물질이 있다. 이를 연구하려면 지렁이 유전자나 세포를 보관하는 것은 필수다.
하지만 지렁이가 몇 종이나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국내 생물소재 분야의 현주소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장미 딸기 양상추 종자는 대부분 외국산이다. 국내에서 재배되는 느타리버섯 표고버섯은 어느 나라 품종인지 불분명한 것이 적지 않다고 한다.
폐수를 처리할 때 오염물질 분해를 위해 넣는 미생물조차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해 쓰고 있다.
쌀 밀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식량작물 중 하나인 감자는 미국이 50여 개, 일본이 30여 개 품종을 확보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10여 개 품종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는 와규의 유전자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한우(韓牛) 유전자 정보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고 한다.
영남대 생명공학부 최인호 교수는 “수년간 연구해 얻은 한우 유전자 정보를 후속 연구를 위해 다른 연구자들에게 분양해 주고 싶어도 한국에는 이를 관리해 줄 기관이 없다”고 털어놨다.
미국 주도로 운영되는 세계유전자은행(ATCC)에 기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한우 유전자 정보가 외국 연구자들에게 공개되는 것이어서 그것만은 피하고 싶다고 했다.
‘중국 태국에도 뒤진다고?’
생물소재를 체계적으로 수집 보관 분류하고 연구자들에게 ‘분양’해 주는 곳이 ‘국가지정연구소재은행’이다.
과학기술부도 총 24곳의 생물소재은행을 운영하고 있지만 국제적인 기준을 충족해 세계소재은행협의회(WFCC)에 등록된 것은 12개에 그친다.
현재 WFCC에 등록된 국가별 생물소재은행은 태국(59개) 일본(24개) 미국(21개) 중국(20개) 등의 순이다.
또 2004년 10월 말 현재 각국 소재은행이 확보한 미생물과 세포는 △미국 20만300건 △일본 8만1822건 △영국 7만2162건 △중국 5만6420건 △태국 4만1918건 △한국 2만9013건이다.
서울여대 환경생명과학부 이연희 교수는 “국내 생물소재은행의 연간 예산은 평균 1억 원 수준으로 소재별 특성연구나 분류작업은 엄두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유전자 해독 위한 국가기관 필요
생물소재 중 유전자는 수집 못지않게 ‘해독’도 중요하다. 유전자는 A, T, G, C의 4가지 염기가 복잡하게 반복돼 있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해독하지 않으면 ‘암호’에 불과하다.
최근 충북대 미생물학과 이성근 교수는 실험 도중 새로운 세균을 배양했다. 여러 나라 토양에서 발견되지만 워낙 느리게 자라기 때문에 누구도 배양에 성공하지 못했던 세균이었다.
이 교수는 세균 유전자의 해독을 위해 몇몇 유전자 센터에 공동연구를 의뢰했지만 해독 비용(3억∼5억 원) 때문에 번번이 거절당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박홍석 박사는 “모든 연구자가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유전자 해독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강병화 교수는 “식량과 의약품 연구의 기반이 되는 생물소재는 국가자산과도 같다”며 “어렵게 확보한 생물소재를 외국에 선뜻 내주는 나라는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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