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정리함

선진국에 옷깃 잡히고, 외환위기에 발 채이고

서나노야 2006. 9. 29. 23:40
선진국에 옷깃 잡히고, 외환위기에 발 채이고
창의적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국가 미래를 이끌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자 과학기술부가 지난 1997년 야심차게 출범시킨 ‘창의적연구진흥사업단’(이하 창의연구단) 사업이 2006년 첫 졸업식을 가졌다. 9년 기한으로 쉼 없이 달려온 1997년도 연구단이 연구 과제를 무사히 종료한 해이기 때문이다. ‘창의세상’은 원년 연구단의 과제 종료를 맞아 3회에 걸쳐 창의연구단의 발자취와 성과, 과제를 돌아보는 기획 기사를 준비했다. <편집자 주>

“실제로 처음 3년간은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연구를 거의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죠. 그러던 중 연구 때문에 실험실에서 숙식을 하며 분투하던 박사과정 학생 한 명이 간단한 수법 하나를 고안했는데, 이로 인해 우리가 만들던 기기의 성능이 1천배나 좋아지는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동력학적 반응유도 연구단을 이끄는 김명수 서울대 교수는 기초연구를 위한 ‘MATI-PD’ 기기 제작 초기만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를 젓는다. 실험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잠을 줄여가며 매달려도 원하는 데이터가 좀체 나오지 않았던 기억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 생채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심사 미루고 추가자료 요구, 노골적 견제

초전도 연구단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이붕소마그네슘(MgB2) 초전도체 모형도.
지난 9년동안 창의연구단이 이룬 성과는 눈부시다. ‘사이언스’, ‘셀’, ‘네이처’ 등 세계 3대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만도 26편. 같은 기간동안 게재된 우리나라 논문이 114개이니, 4개 중 1개가 창의연구단에서 나온 셈이다. 각 분야의 권위 있는 전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수나 SCI 피인용지수 등을 따지면 그 성과는 더욱 화려해진다.

하지만 이런 달콤한 열매 뒤에는 보이지 않는 땀과 눈물, 불면의 밤들이 얼룩져 있다.

감각신경세포에 존재하는 이온채널의 종류와 기능을 규명해, 우리 몸의 통증 발생원리를 이해하는 연구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오우택 교수(통증발현 연구단). 1997년 창의연구단 과제를 처음 시작할 때 오 교수는 쓸 만한 연구원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당시만 해도 지금의 ‘박사후 연구원’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라, 관련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춘 인재를 구할 경로가 제한돼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과의 경쟁은 더욱 힘든 과정이었다. “연구팀이 발전하고 성장할수록, 논문 게재 과정에서 외국 저명 학자들이 부리는 텃세도 더욱 심해졌다”고 오우택 교수는 연구 초기를 회상했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 생각했어요.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죠.”

초전도 연구단의 이성익 교수 또한 비슷한 기억이 있다. 초전도 연구단은 이붕소마그네슘(MgB2) 초전도체 박막과 단결정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초전도 물질의 활용 가능성을 넓힌 것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처음 연구결과를 발표할 때만 해도 선진국들의 견제가 너무 심했어요. 논문을 제출해도 이유 없이 심사기간이 늘어지거나 이런저런 보충자료를 제출하라는 등 노골적인 수준이었어요.”

오우택 교수는 감각신경세포 내 이온채널의 종류와 기능을 규명해 우리 몸의 통증 발생원리를 이해하는 연구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러 신경세포가 연결돼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 상상한 그림.
2001년 3월 시애틀에서 열린 물리학회에서 이성익 교수는 2분 발표, 1분 질문의 짧은 시간을 할애받았다. 당시 2분의 발표 시간을 다 쓴 뒤 그는 밤새도록 참가자들에게 ‘시달리는’ 행복감을 맛봤다. 학회에 참가한 각국 과학자들이 연구단의 실험 노하우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듬해 열린 물리학회에서 이성익 박사는 연사로 초대받아 36분동안 강연을 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창의연구단 사업의 특성상, 주변 연구자들로부터 ‘이해할 수 없다’며 손가락질 받는 일도 예사였다.

지금은 나노입자의 크기와 모양을 제어하는 에어로졸 분야의 최고 권위 학술지 ‘저널 오브 에어로졸 사이언스’의 편집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최만수 교수(나노입자 제어기술 연구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나노기술은 다학제간 연구가 필수적인데요. 연구 초기엔 기계공학을 전공한 제가 나노입자 연구를 하는 것을 두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학자들도 많았어요. 연구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레 전통적 기계공학의 범주를 넘어가게 됐는데요. 실험실 학생들조차 재료공학과 물리학 등 다른 학문과 기계공학을 융합해야 한다는 점을 설득시키기가 쉽지 않았죠.”

자외선 우주망원경 연구단이 미국 NASA와 공동 연구 과정에서 만든 우주망원경 갈렉스(GALEX).
세포의 핵 안에 독립적인 칼슘 저장기간을 발견하고, 칼슘이 세포질의 분비과립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내 질병 치료의 신기원을 제공한 유승현 인하대 교수(세포분비 과립 연구단) 또한 “연구단의 이론이 새로운 것이어서, 기존 이론을 수용하는 전문가들이 연구 결과를 안 믿으려 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IMF 외환위기도 초창기 창의연구단의 발목을 잡는 악재였다. “연구단 설립 직후인 1997년 12월에 IMF 금융위기를 맞아 연구비가 갑자기 반감됐어요. 당시 미국, 프랑스 등 외국 기관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요. 우리 연구단이 ‘자외선 콜리메이터’ 장비를 2년 이내에 책임지고 구축하기로 약속돼 있었는데, 환율 급락으로 그게 어려워진 거죠. 연구가 좌초될 수도 있었지만, 연구팀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매달린 끝에 10여건의 핵심 소프트웨어 개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자외선 우주망원경 연구단 이영욱 교수의 회상이다. 이 연구단은 미국 NASA, 프랑스 LAM 등과 공동 연구를 진행할 정도로 세계적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다.

우연한 실험에서 ‘조직 플라스미노겐 활성요소’(tPA)의 신경세포 보호 효과를 발견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고재영 울산대 교수(중추신경계 시냅스아연 연구단)는 “새로운 발견은 종종 예기치 않았던 상황에서 나온다”며 실패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마음의 자세를 강조했다.

글/이희욱 동아사이언스 기자 heeuk@donga.com (2006년 0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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