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을미사변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 알아?" “글쎄......모르겠는데......” “1895년이다. 공부 좀 해라. 일본 쪽바리 놈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아니냐! 너 명성황후는 누군지 아냐?” “에이~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아? 이미연 이잖아. 캬~ 연기 정말 끝내주던데......” “쩝......”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화 내용일 것이다. 2003년도에 큰 인기를 끌었던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나온 대사를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 보았다. 이 대화에서 공부 못하는 이 학생에게 명성황후는 이미연으로 기억 된다. 물론 재미를 위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자신이 좀 떨어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영화 ‘가문의 위기’에서 탁재훈이 오렌지 주스는 영어로 ‘델몬트’라고 한 것, 한참 삼순이가 인기를 끌 무렵 30대 노처녀들은 모두 삼순이로 대변되었던 것 등은 모두 본질과 이미지의 혼동에서 생겨나는 일들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인물인 장 보드리야르에 의해 만들어진 이 시뮬라시옹(Simualtion)이론은 이미지가 범람하는 ‘포스트 모던사회’의 모습을 잘 투영한 것이다. 시뮬라시옹 이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존재는 본질을 이미지(또는 기호)로 표현되어 타인에게 인식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실재를 대체하는 사회이다. 본질을 복사하여 끊임없이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본질을 넘어서, 더욱 실재 같은 극실재(하이퍼리얼리티)를 만들어 낸다. 이제는 본질과 이미지의 관계가 역전된, 본질과 이미지 사이의 차별이 없어진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실재하는 본질로 사유하지 않는다. 오감을 통해 들어온 무수히 많은 이미지를 가지고 대상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시뮬라시옹의 문제는 이미지가 본질을 압도하여 실재를 대체한다는 것이다. 명품은 ‘질’이 아닌 ‘가격’으로 평가되고, 돈 많은 재벌2세는 모두 일보다 연예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모든 이미지는 실재에 근거하지만, 점점 실재에서 멀어지고 있다.
물론 이미지가 본질의 대표성을 갖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이 이미지에 가려져, 본질과 이미지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지 범람의 시대. 하루에도 수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이미지의 시대에서 본질에 대한 진지한 사고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이미연이 되는, 이러한 생각이 만들어 질 정도의 혼란은 분명 현 시대의 큰 문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