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저희 출판사에서 나온 신간입니다" 매일 이렇게 건네 받는 책이 이십 여권 안팎. 제본소 기계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는, 말 그대로 따끈따끈한 새 책을 받아 들 때면 기분 좋은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책의 첫인상이며 만듬새, 내용 등을 훑어 본 후 나는 책에게 가만히 말을 걸어본다. "자, 이제 너의 운명을 말해주렴"
'좋은 책을 잘 골라 더 많이 파는' 일을 업으로 하다 보니 책을 손에 쥔 순간 이 책의 운명이 궁금할 수 밖에 없다. 거의 모든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청운의 꿈을 품고 나오지만(그렇지 않은 책들도 물론 있다) 사실 그런 운명을 타고난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제 책의 운명을 얼추 가늠할 정도의 공력은 갖췄다고 생각하나 가끔 뒤통수를 치는 책들에 된통 당하고 나면 여전히 내가 '하수' 임을 절감한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어찌 사람의 운명 뿐이랴, 책의 운명도 마찬가지일 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다. 처음 이 책을 받아 보았을 때 그닥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백혈병에 걸린 청춘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얘기가 얼마나 독자들에게 먹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 불치병과 가슴 아픈 사랑이라... TV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울궈먹는 단골소재가 아니던가.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까? 설마, 설마, 에이 설마. 그런데 그 설마가 사람 잡았다. 물론 처음부터 이 책이 잘 나간 것은 아니었다. 출간 몇 달이 지나서야 입소문을 타고 서서히 반응을 얻기 시작, 영화 개봉과 맞물리면서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버린 것이다. 아이고, 이 책을 내가 왜 놓쳤을꼬!, 라고 후회해본들 이미 떠난 버스에 열심히 손 흔드는 격이다. 이 책 이후 일본에서 드라마 혹은 영화화 되서 인기를 모은 작품들은 출판시장에서 몸값 꽤나 뛰었단다. 이 일의 교훈?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꺼진 로맨스도 다시 보자" - 가슴 깊이 콕콕 새겨 뒀다.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도 기억에 남는 책이다. 워낙 마케팅 잘하기로 소문난 출판사에서 기획한 책이라 판매가 어느 정도 예상되기는 했다. 하지만 "어쩌구 저쩌구 몇 가지 이야기"라는, 비슷한 제목의 고만고만한 책들이 많이 출간된 터라 그렇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총 예상 판매부수를 이야기하는 출판사 담당자에게 "에이~ 설마요~" 했더랬다. 역시나, 이번에도 설마가 사람 잡았다. 책 자체의 힘과 마케팅의 힘이 서로 맞물려 왕대박 베스트셀러가 탄생한 것이다. 같은 책이라도 어느 출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책의 운명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을 확실히 깨닫는 순간 이었다.
'혼자서도 잘해요' 케이스도 있다. 출판사도 담당 MD도 예상치 못했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홀로 고분군투해 살아남은 경우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가 대표적인 예다. 문학시장의 경우 신간 회전율이 상당히 빠른 편이다. 출간 당시 얼굴만 내밀었다가 그대로 묻히는 책이 부지기수. 이 책은 2004년 여름에 나와 별다른 마케팅 없이 꾸준히 팔리다가 오직 책의 힘만으로 2005년 베스트셀러를 장식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참으로 기특한 효자상품이라 하겠다. 이번에 출간된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실천편)>은 어떤 운명일지 자못 궁금하다.
이 외에도 소수의 팬들만 열광하던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이 표지갈이 후 베스트셀러가 된 일이나(물론 여러 외적인 요인도 작용했다) 절판됐다가 재출간되어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또한 책의 운명- 그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이렇듯 모든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하지만 '베스트셀러'만이 책의 성공한 운명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소수의 탄탄한 지지를 받는 좋은 책들, 누군가의 가슴에 하나의 문장만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그 책은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것이 아닐까? 모든 책이 예측 가능한 운명을 지녔다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예측불허의 묘미도 책을 다루며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오늘도 이 많은 책들의 운명을 궁금해 하며 열심히 책을 뒤적거려본다. 아시다시피 그 운명은, 어느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