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정리함

[결단의 순간들]한경희생활과학 한경희 사장(2)

서나노야 2006. 9. 17. 08:28
[결단의 순간들]한경희생활과학 한경희 사장(2)

[전자신문 2006-04-19]





1986년 9월 새벽 4시 드디어 스위스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다. 간간이 가는 비가 흩날리는 새벽, 혼자가 됐다는 해방감보다 쓸쓸한 마음이 먼저 일었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곳이었다. 가족으로부터의 독립, 내가 오랫동안 희망하던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스위스 공항에서 느낀 가슴 한쪽이 알싸해지던 그 기억…. 나는 새벽안개 속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정취를 느끼고 있었다. 열여섯,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때 읽은 전혜린의 에세이가 떠올랐다. 뮌헨과 슈바빙, 그녀가 누비고 다니던 이국적인 풍경, 자유의 냄새가 그 시절의 나는 미치도록 부러웠다. 마치 그녀처럼, 나도 낯선 외국 땅에서 적당한 고독감을 즐기고 맛보았다.
 IOC 사무국에서 일하는 시간은 무료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도는 시간들. 스위스 로잔에서 일할 IOC 직원을 뽑는다던 취업 공고를 보았을 때 느꼈던 벅찬 희열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동양에서 온 노란 얼굴의 여직원일 뿐이었다. 매일 스포츠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는 일은 지루한 단순 노동이었다. 신문기사나 오려 붙이려고 이 먼 곳까지 날아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문분야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성취감이 필요했다.

 나는 여기서 수십명의 사무국 직원 중 일개 말단 사원에 불과했다. 더는 영어와 불어를 잘하는 것이 특권이 될 수 없었다. 점점 방황을 시작했다. 외로웠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곁에 없다는 허전함. 나는 조금씩 시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서울의 모습이 그리웠다.

 스위스를 떠나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직장이 안정적이고 보수가 높다 해도 내 이상과 비전을 위해서는 그곳을 떠나는 게 현명했다. 무엇보다 나는 정체되고 조용한 조직에 어울리지 않았다. 스물네 살, 한창 열정적으로 일할 나이였다. IOC 업무를 통해 어떤 의미든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드디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왔다. ‘한경희, 다시 시작하자!’ 떠나기로 마음을 굳히고 나니 모든 것이 홀가분했다.

 내가 미국으로 건너가 MBA 과정을 밟겠다고 결심한 해는 한국에서 88올림픽이 유치되던 해였다. 당연히 사무국에서는 다른 어느 때 보다 내가 필요했다. 퇴사하겠다는 뜻을 밝히자마자 국장이 호출했다

 “이게 뭡니까?”

 “사직서입니다.”

 “올해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한국 사람인 한경희씨가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제 인생에서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아서요.”

 1년 반 정도의 IOC 사무국 생활을 청산하고 나는 미국을 향해 달려갔다. 또 한 번의 도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도통 겁이라고는 없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 땅에 무작정 건너갔으니 고생문이 훤히 열린 셈이었다. 고생을 하게 될 거라는 각오쯤은 이미 서 있었으므로 두려움은 없었다.

rhahn@steamcleaner.co.kr